[정수지의 미술로 보는 마음이야기] 몸에 갇혀버린 소녀

세린이는 아무 기억도 하지 못했다.


미술치료실에서 처음 본 세린이는 약간 경직된 듯해 보였지만, 평범한 사춘기 소녀였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붓을 집어 든 수줍은 소녀는 쉽사리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이젤에 걸린 하얀 도화지는 그녀에게 너무 벅차보였다.


▲ 정수지 미술심리치료연구소 대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세린이를 위해 나는 잠시 명상을 해볼 것을 제안했다. 몸의 형상을 떠올리며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느낌을 인지해보라 조언했다. 명상을 끝낸 뒤 세린이에게 몸의 느낌이 어떤지 표현해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세린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꽤 긴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림을 그렸다.


 세린이는 몸이 무거운 느낌이라고 했다. 무언가가 꿈에 항상 나오지만, 그것이 귀신인지 아니면 그림자인지 잘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양쪽 어깨에 찌릿찌릿한 느낌이 나거나 누르는 느낌이 난다고 했다. 몸은 감각을 잘 느낄 수 없다고 했지만, 이따금 파도가 밀려오듯 다리 쪽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 세린이의 그림


“가만히 있다 보면, 다리 쪽에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가 사라져요. 그래서 파도를 그린 거예요. 그리고, 이 빨간색 별이 그 찌릿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아무 기억도, 생각도 나지 않는데, 몸에서 불안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13세 소녀 세린이는 한 달 전에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그 이후로 세린이는 불안 증세를 보였으나, 아무 기억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따금 밀려오는 몸의 기억이 세린이를 괴롭혀왔고, 이제 겨우 십대의 나이에 매우 힘들어하고 있었다.

트라우마는 머리로 기억하기 보다는 몸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정도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준 일수록 시간적 흐름이 깨진 형태로 뇌의 한 공간에 저장된다. 세린이의 그림은 ‘몸에 갇힌 기억’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몸으로 감당해내는 아이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기억을 직접적으로 건드리기 보다는 세린이의 감각을 그림을 통해 천천히 알아보고 안정된 기반을 구축한 후에 천천히 회복할 힘을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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